
카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은 한 인간이 '소임'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얼마나 희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걸작입니다.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사회의 변화 속에서, 한 집사의 삶을 통해 충성심의 본질과 자아의 방향을 질문합니다. 단순한 회상록처럼 보이지만, 정교한 심리 묘사와 상징으로 가득한 이 소설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담고 있어, 2024년 독자들에게 다시금 큰 감동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소임, 완벽한 집사의 길
『남아 있는 나날』의 주인공 스티븐스는 한때 위풍당당했던 영국 귀족 저택인 달링턴 홀의 집사입니다. 그는 집사라는 직업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완벽한 집사’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하며, 매 순간 태도와 언행을 절제하고 균형 있게 행동하려 애씁니다. 이것이 그의 ‘소임’이자 삶의 이유였던 셈이죠. 소설의 줄거리는 스티븐스가 새로운 주인을 위해 몇 일간의 자동차 여행을 떠나는 과정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회상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중요한 여정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충실하고 올바른 길이었다고 믿으려 하지만, 여정을 거치며 자신이 얼마나 많은 감정과 기회를 외면해왔는지를 서서히 깨닫습니다. ‘소임’은 직업적 자긍심으로 포장되지만, 스티븐스의 경우 그것이 지나치게 강박적이어서 인간으로서의 본질적인 감정들 — 사랑, 슬픔, 공감 — 을 억압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이 작품은 현대 독자에게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지금 어떤 사명감에 매몰되어 내 삶을 놓치고 있는가?”
충성심, 주인에 대한 맹목적 헌신
스티븐스의 삶은 달링턴 경에 대한 충성으로 요약됩니다. 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인의 결정을 신뢰하고, 그 뜻을 실현하기 위해 철저하게 봉사합니다. 하지만 이 충성심은 단순한 직업적 책임을 넘어서, 스스로의 도덕적 판단과 인간적인 감정마저 희생하는 수준에 이릅니다. 달링턴 경은 전쟁 전 나치 독일과의 화해를 주장하며 국제 정치에 관여하려 시도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친나치로 낙인찍혀 몰락합니다. 스티븐스는 그의 행동에 대해 ‘집사의 역할이란 정치적 판단을 하지 않고 주인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라 말하지만, 독자는 그 안에 숨겨진 깊은 갈등과 자기 부정을 읽게 됩니다. 특히, 스티븐스가 정치적 판단은 주인의 몫이라며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는 장면은, 현대 사회에서도 반복되는 ‘맹목적 충성’의 문제를 떠올리게 합니다. 직장에서, 조직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윗사람의 결정이니까 따르는 것"이라며 스스로의 윤리적 판단을 유보하고 있을까요? 『남아 있는 나날』은 충성심이라는 가치가 얼마나 이중적일 수 있는지를 섬세하게 보여주며, 독자로 하여금 진정한 책임과 도덕적 주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만듭니다.
삶의 방향, 나를 위한 선택은 무엇인가
스티븐스는 과거를 돌아보며 ‘나는 과연 제대로 살아왔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는 미스 켄턴이라는 하우스키퍼와 깊은 감정적 교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녀에게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놓쳐버립니다. 그것이 직업적 소임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완벽한 집사’로 남았지만, 인간으로서의 진짜 삶은 놓쳐버린 셈입니다. 『남아 있는 나날』의 감동은 바로 이 부분에서 폭발합니다. 너무 늦게 깨달은 후회, 그리고 그 후회조차도 이성으로 억누르려는 태도. 그러나 독자는 알 수 있습니다. 스티븐스는 이미 알고 있었고, 단지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이 소설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은 정말 당신이 원했던 길인가요?” 삶은 늘 선택의 연속이고, 그 선택이 쌓여 인생이 됩니다. 이시구로는 독자에게 '남아 있는 나날' 동안이라도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라고,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란다고 조용히 속삭입니다.
『남아 있는 나날』은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감정을 억누른 한 남자의 고백이자, 인생이라는 여행의 마지막에서 던지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기준에 따라 살고 있는가, 그리고 나의 선택은 진정 나의 것인가. 이 작품은 독자에게 조용히 말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남아 있는 나날은 당신의 것이다." 2024년의 오늘, 삶의 방향을 되돌아보고 싶다면 이